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한 인물의 일대기나 시각을 통해 조명하는 방식은 눈 여겨볼만 하다. 이러한 방식은 나름의 서사 구조를 가진데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재미있는 건 화성시 출신이 아니면서 화성시에 묻힌 한 인물이 있어 눈길을 끄는데, 바로 서거정(1420~1488) 선생이다. 서거정 선생(이하 서거정)의 묘는 왕림리에서 장안대학교로 가는 길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정표를 통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동안 수 없이 지나다닌 길이지만 서거정의 묘가 화성에 있다는 것은 낯설고,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그런데 어떻게 서거정의 묘가 화성에 자리하게 된 것일까?

▲서거정 선생의 묘     © 편집국

■ 조선 초기의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낸 서거정

조선 초기의 역사에서 서거정(1420~1488)은 다양한 방면에서 이름을 드러낸다. 서거정의 본관은 달성으로, 훗날 ‘달성군(達城君)’으로 봉작되고, 세상을 떠난 뒤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누이는 최항 선생에게 시집을 갔는데, 최항 선생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실제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에 있는 최항 선생의 묘비를 쓴 사람이 바로 처남인 서거정으로, 서거정의 가문은 당대 명문가들과 인척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 대구 달성공원에 자리한 ‘달성서씨유허비’    © 편집국

서거정은 세종 대 처음으로 관직에 나선 뒤로 성종 대까지 활동했던 인물로 역사와 법률, 천문과 지리 등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는 서거정 어떤 집필에 참여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단군조선을 시작으로 고려 말에 이르는 역사서인 <동국통감>을 비롯해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등의 많은 관찬서를 편찬했다. 특히 그가 활동하던 성종 때는 조선의 문물이 정비되고, 안정된 시대로 나아가는데 있어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또한 자신의 시문집인 <사가집>을 남겼는데, 한번은 ‘최부’라는 인물이 명나라를 다녀가게 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의 문인들이 최부를 보며 서거정의 안부를 물었을 정도로, 그 명성 역시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광주시 퇴촌면 도마리에 있는 최항 선생의 묘, 최항 선생의 처남이 바로 서거정 선생이다.     © 편집국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서거정의 활약은 단종 때 있었던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을 회피했기에 가능했는데, 당시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당시 서거정이 모친상으로 인한 상중이었기에 후폭풍에서 피할 수 있기는 했다. 다만 절개를 지켜 죽음 혹은 벼슬을 버리는 방식으로 세조의 통치에 저항했던 사육신이나 생육신과는 선을 그으면서, 그는 세조 대에도 중용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명분이냐 현실이냐의 고민에서 나름의 현실적인 노선을 선택했던 모습이 엿볼 수 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서거정이 조맹부의 적벽부 글자를 모아 칠언 절구 16수를 지었는데, 이를 본 세조가 감탄하면서,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고 평가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 최초 방이동에 묻혔다가 봉담으로 이장된 서거정의 묘

한편 서거정은 1488년 12월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12월 24일자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졸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최초 서거정의 묘는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에 조성이 되었다. 즉 애초부터 봉담에 조성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묘를 옮겨야 했던 이유는 방이동 일대가 개발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데, 결국 이장이 결정되어 1975년 6월 13일 현 위치로 옮겨진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서거정의 묘다. 당시 이장을 하는 과정에서 ‘서거정선생묘지석(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6호)’가 출토가 되었는데, 이후 종중에서 보관하다가 박물관에 기증,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  서거정 묘의 묘갈   © 편집국

역사적으로 보자면 전국구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봉담에 서거정의 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가 않다. 또한 현장을 가보면 서거정의 묘가 있다는 이정표만 있을 뿐 서거정의 묘를 비롯해 재실인 ‘염수재(念修齋)’, 신도비 등의 안내문을 찾기가 어렵다. 분명 봉담읍에 자리하고 있지만 왠지 모르게 외면을 받는 그런 느낌이랄까? 어쩌면 앞서 말한 것처럼 서거정의 묘가 화성에 있는 것이 낯설고,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화성시에 자리하고 있는 서거정의 묘는 충분히 시대를 읽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에 따라 서거정의 묘를 버려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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