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도근 교수(철학박사)     ©편집국

누구든 무엇이든 고유한 영역을 지키는 것이 아름답다
인간은 한 편으로는 자연의 일부로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신체는 과학에 의해서 탐구될 수 있고 그러한 과학에 의해서 몸의 건강이나 질병 등에 대해서 과학적 탐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정신의 경우에 있어서도 정신과학의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여러 다양한 기술로 인해 쾌락, 재미, 안락함, 편의성 등의 혜택을 입는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만 도움이 될 뿐 이다.
반대로 신앙을 통해서는 과학을 통해서 채워질 수 없는 삶의 궁극적인 존재의미를 알게 하거나 죽을 병에 걸린 사람에게 조차도 희망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삶의 쾌락이 아무리 대단해도 그러한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삶의 진정한 의미나 존재의 궁극적 목적 탐구 등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사유는 신앙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육체가 더 이상 쾌락을 위해 작동하는 데 둔감해지고 지평선 너머로부터 삶의 종말을 알리는 음산한 구름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할 때 더욱 그 가치가 드러난다. 그리고 영혼이 뿜어내는 생존의지로서의 신앙은 점차 본연의 가치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현대는 점차 과학이 주는 이득을 더 중시하고 신앙이 주는 위로는 경시하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물질이 주는 혜택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도 된다. 때문에 오늘날 세계인들에게 유의미한 것은 기하학의 합리성과 과학의 경험성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과연 기하학과 과학은 하나님의 피조물 세계에 관한 일체의 지식이긴 하다. 그러면서 일체 피조물의 세계는 다만 ‘자연적인 것’(自然, 저절로 그렇게 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자연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자연세계의 모든 현재의 원인은 자연 자체에 있고 모든 원인들의 결과도 자연적인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신앙으로서 보면 자연은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이다.
신앙과 과학의 차이는 전자는 창조자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고 과학은 피조물인 자연을 아는 지식이다. 인간은 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다스리는 힘을 얻고 신앙을 통해 하나님이 그의 선민들의 삶에 부어 주시는 경건한 태도와 영혼의 만족을 얻는다.


문제는 우리 시대의 과학이 결코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되지 못하면서 마치 삶의 전부인 양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앙이 그 고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회전체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것도 문제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정치를 보면 신앙의 영역에만 머물던 종교가 사회와 정치의 영역에 끼어들어 영향을 끼치려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종교가 사회 병리현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벌인 캠페인들에서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하물며 정치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파는 행위 등은 그냥 추태로 보인다.


과학이든 종교든 고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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